모카's LifeStory

[펌] 복날과 삼계탕

캬라멜모카라떼 2014. 8. 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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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과 복달임의 탄생

‘삼복더위’란 말은 더위의 절정을 연상시키는 관용어가 되었다.‘삼복三伏’은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말이 생겨난 것은 2000년 전 중국 진나라 시대(BC 221〜BC 206)부터다. 사마천의『사기史記(BC 104~101)』에는 진나라 덕공德公이란 사람이 사대문 밖에 개고기를 걸어두고 복사伏祠를 처음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초복은 24절기 중 지구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는 하지夏至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다. 하지는 양의 기운이 절정에 달하는 날이다. 그런데 경庚은 가을의 기운을 가진 날이다. 그러나 강력한 여름 기운에 가을의 서늘한 기운은 맥을못추고 쓰러져 엎드려있게 된다.‘복伏’이란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가을 기운이 엎드린 탓에 여름의 기운은 더욱 거세지게 된다. 복날이 더운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여름기운이 변하기 시작하는 복날에는 가을 기운金을 가진 음식을 먹어야 몸이 온전하게 보전된다고 믿었다. 복날의 음식은 이런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상은 더위에 지친 몸을 보충하는 실용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 더워지면 수분은 땀으로 배출되고 차가운 음식을 먹은 속은 더욱 차가워져 배탈이 나거나 서중暑中같은 병이 생긴다. 더위는 더위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는 이런 우리 몸의 기본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과학이다. 한국인은 복날에 먹는 이런 음식을 '복달임'이라 불렀다. 복달임은 한문‘복’과 순수한 우리말‘달임’의 합성어다. 복날에 달여 먹는 따스한국이나 탕을 의미하는 말이다.

삼계탕 이전의 복달임 음식들과 대구의 육개장

지금은 복달임 음식의 중심에 삼계탕이 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삼계탕은 부자들이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 이전에는 개장狗醬즉 개고기 국이 중심에 있었다.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간된 세시기歲時記들인『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하나같이 개장국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개고기를 싫어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탓에 개장국과 거의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내는 육개장肉狗醬이 만들어진다. 19세기 말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개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대구에서 꽃을 피운 음식이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육개장은‘육개장’,‘대구탕반’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음식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밥과 국을 따로 내면서 따로국밥이란 말이 더해졌다. 그 밖에도 복달임 음식은 더위를 몰고 오는 악귀를 물리치는 팥죽과 궁중에서 먹던 깨죽, 여름철에 제 맛이 나는 호박에 민어를 넣고 끓인 민어탕이 삼복더위를 물리치는 대표적인 복달임 음식들이었다.

삼계탕의 등장

 

그런데 어느날삼계탕이 복달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삼계탕이 외식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1960년대부터 계삼탕 혹은 삼계탕으로 불리던 삼계탕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여름철 외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과연 삼계탕은 195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음식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삼계蔘鷄’란 이름은 19세기 부터 등장하고 삼계탕이란 이름은 붙어있지 않지만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들은 여럿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계탕의 조상쯤으로 생각되는 음식들은 조선 시대에 여럿 등장한다. 조선중기의 문신 박정현이 1609년에서 1635년까지 기록한 일기인『응천일록凝川日錄』에는 황계탕黃鷄湯이 등장한다. 1773년『승정원일기』에는‘연계탕軟鷄湯’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등장하는‘계탕’들은 건더기 중심이 아니라 국물 중심이었다. 이처럼 닭을 푹 고아 국물을 마신 기록은 이외에도 여럿 남아있다. 17세기 중반에 쓰여진 조리서인『음식디미방』에는‘수중계’가 나오고 1766년에 편찬된『증보산림경제』에는‘총계탕’이 있다.‘삼계蔘鷄’란 이름은 개화파 김윤식의 일기인『속음청사續陰晴史』1887년자에 인삼과 닭을 넣고 푹 고은‘삼계고蔘鷄膏’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1894년 이제마가쓴사상의학서『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삼계고가 설사병 치료제로 등장한다.

삼계탕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1910년에 일본인들이 작성한『중추원조사자료』다. 이 자료에는‘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즉 인삼을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액을 정력精力약으로 마시는데, 중류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라고 적고 있다. 보약이 아닌 요리로서 삼계탕과 가장 유사한 기록은 1917년판『조선요리제법』이란 조리서에 닭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리라’라고 적고 있다.


 

 

 

 

 

삼계탕의 주원료는 어린 닭인 연계

 

그런데 18세기『승정원일기』의 연계탕 기록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닭 요리에 들어가는 닭은 새끼를 낳지 않은‘연계軟鷄’다. 연계를 이용한 ‘연계백숙軟鷄白熟’은 삼계탕이 대중화되기 전에 복날에 먹는 복달임 음식 중 하나였다. 연계를 영계라고도 부르는데 연계백숙 혹은 영계백숙이란 말의 ‘백숙’은 간을 하지 않고 닭을 끓인 것을 말한다. 백숙을 끓일 때는 맹물에 보통 마늘을 집어넣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다. 백숙에 마늘 대신에 인삼이 들어간 것이 삼계탕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연계백숙 조리법에는 ‘혹 인삼먹는 이는 삼을 넣어’란 구절이 나온다.

 

인삼가루가 아닌 인삼을 직접 넣어 요리를 해먹은 가장 이른 기록이다. 20세기 초반의 신문 기사들에 종종 등장하는 북한의 복날 음식으로 ‘연계찜’이 있다. 연계찜은 연계의 배속에 찹쌀과 여러 가지 고명, 향료를 넣고 쪄낸 것으로 삼복에 함경도 사람들은 연계찜을 반드시 먹었다. 1929년 8월 1일에 발간된『별건곤』제22호에는 황해도 안주를 돌아본 뒤 쓴 기행문이 나온다. ‘영남지방에서는 삼복 중에 개죽음이 굉장하다. 하지만 안주의 명물로 삼복중의 닭천렵이 대단하다’고 적고 있다. 경상도나 전라도 같은 남도가 복날에 개를 복달임 음식으로 먹은 것에 비해 함경도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북한 지역에서는 닭을 복달임 음식으로 먹어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삼계탕은 아니지만 복날에 닭을 먹는 문화는 북한 전역에 넓게 퍼져있던 문화였다.

 
 
 

 

삼계탕의 대중화

 

양반이나 부자들의 약선藥膳음식이었던 삼계탕이 대중화된 것은 닭고기가 대중들이 먹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닭고기보다 더 비싼 인삼도 삼계탕 대중화에서 빼놓을수없는 요소다. 1910년대부터 인삼가루가 부자들에게 인기를 모으자 약으로 먹던 삼계고 삼계음을 벗어나 요리에서 인삼가루가 등장한다. 1950년대 인삼가루를 넣은 닭국물이 등장하면서 식당주인들은 ‘계삼탕’이란 이름을 붙이고 영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중화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 1960년대 이후 인삼가루가 아닌 생 인삼인 수삼水蔘이 정부규제 완화와 냉장시설의 발달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자 상인들은 계삼탕보다 인삼에 방점을 둔 삼계탕이란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한다. 196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육류 소비가 급증하게 되는 1975년 이후에 닭 한마리와 인삼을 같이 먹을수있는 삼계탕은 여름 최고의 보양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약에서 시작해 부자들의 식탁을 거쳐 대중들의 여름철 최고의 보양음식의 탄생은 긴 과정이 필요했지만 음식이 완성되자 한국인은 물론 동북아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음식이 되었다.

 

글·사진.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문출처 :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30/20130730021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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